멜기세덱에 관한 글을 보니 바보같은 소리가 여기서도 되풀이 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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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이란 인물은 실존의 인물이 아니라 가공의 상징적 인물이다. 물론 개독들 가운데에도 멜기세덱이 가공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조상의 뿌리를 형성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 뿌리를 아브라함에 두고 있다. 물론 아브라함이 실존한 인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다. 한민족의 뿌리가 단군에게 있다고 믿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유대인은 자신들을 수호하고 지켜야 할 수호신으로서 여호와를 통한 지도자적 인물을 신격화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신을 바치는 대상으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예수와 멜기세덱의 관계가 언급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적 제사장의 뿌리가 예수가 된다는 생각은 구약의 제사장의 뿌리인 멜기세덱과 연결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이런 내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에 대하여도 좀 제대로 알고 용어를 사용해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 바친 것은 구약의 율법에 있는 십일조가 아니다. 많은 목사들도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엉뚱하게 십일조를 강조하면서 이 구절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지만 원래 십일조란 곡물이나 육축 가운데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한 십분의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은 전쟁을 통해 얻어진 노략물 가운데 십분의 일을 바치고 있다. 성경, 특히 구약에 나타난 숫자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인에게 십이란 '완전함'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완전함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를 충족시키는 입장에서 본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내용은 여호와에게 선택되어 사용되는 아브라함이 신의 섭리에 의해 전개된 영적 전쟁을 통해 얻어진 것 가운데 자신을 이신에게 드려서 바치는 신의 요구를 충족켰다는 말이다. '일'이란 한 개인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일(1)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고대에는 중근동이나 동양이나 유사하게 나타났다는 사실 좀 제대로 알고 성경과 고대문서를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천부경을 보아도 일(1)이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로 쓰여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고 또 한자에 사람 인이라는 글자가 한 일자처럼 생긴 두 개의 막대기 같은 상형문자가 서로를 받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구약의 율법에 있는 십일조도 결국 그 안에는 영적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즉 십이라는 숫자를 통해 신의 섭리를 충족시키는 한 개인, 즉 나 자신(1)을 신에게 헌신하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신약은 이런 의미에서 '내 자신을 드리는 영적 제사'라는 말을 한 것이고 예수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의미에서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헤서 온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근본주의 개독들은 십일조를 의무화하기 위해 이런 저런 설명을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관계와 논리성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엉터리 설명만 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설명만 들은 안티들도 성경, 특히 구약의 문장과 사건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 교훈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영적'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혹시 개독들이 말하는 '영'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쓴다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까봐 부연 설명을 하겠는데 인간은 종교가 발생한 이래로 '영'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자에도 혼과 영이라는 문자가 생겨난 것이고 고대의 중근동 지역의 사람들도 영이라는 개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경전을 만들면서 영적인 교훈을 담은 글을 신화적인 요소를 통해 전승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영적인 교훈을 담은 것이다. 다만 그 교훈을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상징적 언어들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사실적 역사로 보는 잘못된 해석이 기독교의 시초에 발생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던 배경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 당시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한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과 사상에 물든 그리스와 로마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의 해석은 전승적으로 내려 온 유대인의 사고와 시각이 아닌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식 이분법과 분석법으로 점철되어있고 이원론적인 사상으로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의 세계관에 따라 역사를 선형적이고 직선적인 역사로 보면서 이 세상은 시작이 있고 그 끝인 종말이 있다고 생각하며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래서 창세기를 우주의 창조의 시작으로 그리고 계시록과 복음서에 나타나는 심판을 세상의 끝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선형적인 세계관이 아닌 순환적이고 환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시작하고 끝이 나지만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역사는 반복되고 이렇게 끝이 없는 역사의 순환적이고 환원적인 모습을 성경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초기의 그리스식 철학에 물든 사람들이 이런 유대식 세계관을 바꾼것이고 그것이 기독교의 교리로 또 세계관으로 인류를 장악한 것이다. 그래서 종말론이 나오고 지구의 멸망이란 개념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어느 시대나 발생한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먹사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기도 하고 혹은 일부러 은폐하기도 하기 때문에 일반 개독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븐명히 말하지만 성경에는 '성경은 영을 살리기 위한 책'이라고 쓰여져 있다. 물론 개독들은 이 말은 필요할 때에는 무시하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성경을 이리저리 엉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장와에 의한 속죄제가 어떤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영적 제사의 의미에 어떻게 정확하게 부합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책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논리적이고 상당한 깊이의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초기 기독교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히브리서를 성경에 포홤시킨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교리적 본질을 담고 있다고 분석했기 때문에 포함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기성 기독교가 주장는하는 예수에 의한 구원론이나 역사적 예수를 그들의 주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이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허무 맹랑한 내용이 적혀있는 주장은 정말로 터무니 없고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는 주장이라는 것은 말하고 싶다.
공부 좀 하고 비난이든 비평이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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